티스토리 뷰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발전시켜갑니다.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많은 사상의 진보가 일어났고,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전통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무장한 군대는 전쟁을 일으켰고, 2번의 세계대전으로 인류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문명의 발달로 의식주의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꿈과 소망없이 그저 세상의 시스템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으며, 인생의 갈길을 찾지 못하는 경우 술과 마약 등에 의지하면서 세상을 떠나 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불안함은 어느 때보다 더 커졌습니다. 나르시시즘, 우을증 등 이제는 신체적 고통 만큼이나 정신적 고통의 문제가 만연한 세상을 우리가 만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사상적, 과학적 발전들을 이루어 온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이성의 시대에 기독교에서도 신학적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예로 신학의 꽃이라고 불렸던 조직신학의 발달은 이성의 시대에 하나님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필요한 신학적 도구로 활용되었고, 큰 발달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우리도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익숙함을 넘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성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해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것은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성을 신처럼 절대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입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는 많은 선택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내일 무엇을 할까?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등 이런 저런 선택의 시간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성적 계산을 합니다. 여러 경우들의 수들을 나름 시물레이션을 해보고, 상상해 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마지막 결정은 어떻습니까? 이성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고하며, 계산을 하였는데, 실제적으로 결정할 때만큼은 느낌으로, 감정적으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우리의 모습은 나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이고, 아무리 합리적인 결과를 얻었다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결과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도 이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혹 우리가 이성이라는 울타리에 하나님을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크고,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의 언어로 새롭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움직이는 교회 - 중앙집권형 교회에서 분권형 교회로 (0) | 2018.05.28 |
---|---|
움직이는 교회 - 삶의 예배 (0) | 2018.05.08 |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0) | 2018.03.20 |
왜 십자가인가? -사순절 묵상- (1) | 2018.03.20 |
목회자 이중직 (1) | 2018.01.20 |
- Total
- Today
- Yesterday